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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화(盤花), 상서로운 마음

- 덕수궁 돈덕전 - 2026.6.3~8.30 ○ 당분간 한국에서 열리는 공개 전시에서 이 이상의 공예품을 실견할 기회가 있을까 싶다. 원본이 아니라 복제품이라는 사실이 전시물의 가치를 떨어트리진 않는다. 눈이 호강한다는 말을 실감할 기회. ○ 프랑스와의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 19세기 말 고종이 프랑스 대통령에게 외교 선물로 분경 공예품을 보냈고, 해당 작품은 현재 프랑스 국립기메아시아예술박물관이 소장했다. 전시장에서 복제품을 보면 알겠지만, 워낙 파손 위험이 큰 작품이라 한국으로 원본을 가져오진 못했고, 대신 옥공예 장인(김영희 국가무형유산 옥장 보유자)에게 의뢰해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하게 된 것. ○ 분경은 작은 화분 같은 곳에 실제 식물이나 돌, 공예 재료 등을 활용해 산과 숲..

전시 하이킹 2026.08.25

온 세상 만들기의 비밀을 찾아서

- COMPANY WORLD AFFAIR: 온 세상 만들기의 비밀을 찾아서 - 피크닉(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6가길 30)- 2026.4.3-9.6 ○ 콤파니(COMPANY)라는 핀란드 디자인 스튜디오의 전시. 전시 소개 글에서 전시 주체를 스튜디오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설립자 2인, 아무 송(Aamu Song)과 요한 올린(Johan Olin)의 듀오 전시라고 이해하면 될 듯. ○ 전시물이 통상적인 산업 디자인이나 시각 디자인 작업의 결과물은 아니다. 우선 이들의 작업 방식을 알아야 전시의 구성과 전시물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탐구 재료를 수집한다. 이들이 수집하는 대상은 전통 공예품에서 독특한 장난감이나 주방용품 같은 잡다한 생활용품까지 아우른다. 이후 이들은 수..

전시 하이킹 2026.07.29

번영로 옆 번영주택

4월 초 군산에 갔다. 처음 가보는 도시라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었지만, 여행차 간 것이 아니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숙소도 근대기 유산이 밀집한 구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라 군산 구경이라 할 것은 전혀 못 하고 아쉽게 서울로 돌아올 판이었다. 돌아오는 날 오전에 짬이 나서 숙소 근처라도 거닐까 하는데, 숙소에 온 첫날 밤 눈에 띈 연립 주택이 생각났다. 2층 건물 두 동으로 이루어진 연립 주택이 숙소 옆을 흐르는 개천 건너에 있었다. 두 건물은 서 있기보다는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직한 직육면체 상자 두 개가 땅에 붙은 것처럼 보였다.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오래된 연립 주택을 본다. 그럴 때마다 호기심에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제한된 체류 시간의 한때를 할애하기는 부담스러워 지나치곤 ..

유물 하이킹 2026.06.30

겸재 정선, 아! 우리 강산이여!

-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3실), 2026.2.26~4.26- 글 발행일 이전 종료 전시○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을 리모델링한 후 올해 2월 재개관하면서 처음으로 연 주제 전시. 서화실은 4개 실로 나뉘는데, 이 중 한 곳에서 1년에 3~4차례 주제를 바꿔가며 전시를 연다. 올해는 겸재 정선에 이어 김홍도(5월), 김정희(8월), 조선 말기 회화(12월)를 주제로 전시를 열 계획. ○ 정선의 유명한 그림들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심심하다고 느낀다. 개인소장작이어서 보기 힘든 그림인 가 전시에 나왔는데, 화면 구성이나 표현법에서 파격적인 면모가 있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감각을 자극하는 그림은 아니다. 《겸재정선화첩》에 실린 도 볼 수 있었는데, 워낙 많이 봐서 편향이 생긴 탓도 있겠지만, 금강산 전경을 묘..

전시 하이킹 2026.05.12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

- 이우성 - 갤러리현대- 2026.3.18~4.26 ● 이 작가는 의뭉스럽고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다. 예를 들면, 별 의미도 없는 것 같은데 척척 붙여 놓은 작품 제목이 그렇고, 밀도 있는 화면 한구석에 슬쩍 흘려 놓은 블랙 유머의 흔적이 그렇다. ● 라는 제목의 작품이 두 점 있다. 두 그림 사이에는 연관성이나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데, 나름대로 둘 다 제목과 잘 어울린다. 이런 식이다. ● 2010년대부터 작가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서너 차례 봐 왔는데, 이번 전시작에서는 조형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군상, 인물, 정물, 풍경 등 전시마다 조금씩 초점을 달리한 작품들을 선보였고, 이번 전시작은 풍경 중심으로 구성했다. ● 그림의 소재를 주변 인물이나 일상,..

전시 하이킹 2026.04.21

70년의 시선

- 필립 퍼키스: 70년의 시선 - 류가헌 갤러리, 2025.12.23~2026.1.11 - 글 발행일 이전 종료 전시 ○ 미국 사진가 필립 퍼키스의 사진전. 회고전 성격으로 10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전시 개막 한 달여 전에 작가가 타계했다. ○ 필립 퍼키스는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오랫동안 재직했다. 한국에는 200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으로 기억하는데, 필립 퍼키스에게 사사한 박태희 작가가 번역한 출간이 중요한 계기일 듯하다. 박태희 작가는 이후에도 꾸준히 출판 등의 활동으로 한국에 필립 퍼키스의 작업 세계를 알리는 일을 해왔다. 한국에서는 그의 사진 못지않게 사진 작업에 관련된 태도나 철학이 회자해 왔고, 덕분에 그에게는 사진 교육자이자 그루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 같..

전시 하이킹 2026.03.16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폐사지에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대개 애수, 공허, 쓸쓸함과 같은 감정이 드러난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정서적인 자극을 받기보다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텅 빈 개활지를 마주했을 때의 생경한 느낌이 더 기억에 크게 남는다. 폐사지뿐만 아니라, 야외에 있는 유물을 보러 갈 때면 그런 느낌을 받곤 했다. 그들은 항상 뜬금없이 나타났다. 낮은 집이 모여 앉은 골목 끝에서,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창 밖으로, 키 큰 나무 사이로, 차와 사람이 가득 찬 거리 복판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은 주변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존재감을 풍기며 생뚱스럽게 자리 잡았다는 인상을 줬다. 그럴 때 선명하게 느껴지는 생경함이 좋았다. 잠깐이지만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이 좋았다.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봤을 때도 그..

유물 하이킹 2026.02.27

도널드 저드: 퍼니처

- Donald Judd: Furniture - 현대카드 스토리지(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48)- 2025.11.27~2026.4.26 ○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진 도널드 저드가 디자인한 가구를 모은 전시. 전시 공간의 구조상 네 섹션으로 나뉘긴 하는데, 각 섹션에 눈에 띌 콘셉트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 전시 자체에도 특정한 콘셉트나 상징적인 개념을 활용하지 않았고 특별한 공간 연출도 없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인데, 덕분에 전시가 좀 심심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판화와 드로잉 몇 점도 함께 나왔다. ○ 왜 저드를 비롯한 작가들이 가구 디자인에 관심을 보일까 마음대로 생각해 보면, 건축 관련 지식이 없어도 설계할 수 있는 입체 구조물이라..

전시 하이킹 2026.01.20

보이는 탑, 보이지 않는 탑

그 가운데 보탑(寶塔)이 셋 있으니, 그 첫째가 금탑(金塔)이요, 둘째가 은탑(銀塔)이며, 셋째가 수마노탑(瑪瑙塔)이다. 수마노탑은 지키고 보존하여 지금까지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으니, 이는 산의 영기(靈氣)로 인해 은밀히 감춰진 것인가? 아니면 박복(薄福)한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간혹 보기도 하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하니, 가히 신령스럽고 기이하다고 할 만하겠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바로 보일 줄 몰랐다. 고개를 들면 눈에 들어오는 산봉우리 중턱에 탑 하나가 섰다. 경내로 들어설수록 탑의 형상이 또렷해진다. 이 절에 방문하는 이 거개가 저 탑을 안다. 거개가 저 탑을 보기 위해 절을 찾는다. 부처의 몸, 진..

유물 하이킹 2026.01.12

검은빛의 서사

- 검은빛의 서사: 검은색으로 펼쳐낸 무한과 생성의 풍경-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2025.9.2~11.29 ○ 검은색을 키워드로 한 전시인 만큼 공예품, 도자, 서화류에서 검은색과 관련 있는 것들이 출품됐는데, 서화 중 볼만한 것이 많았다. ○ 전시작 중에는 일반적인 수묵화라 할 만한 것도 있었고, (전시 콘셉트에 맞춰 골랐을) 배경 등에 먹을 진하고 풍부하게 쓴 작품도 있었음. ○ 이정근 작 (조선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는 단순하면서도 과감한 구도가 시원하다.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이어지는 가상의 대각선이 화면을 양분하면서 점진적으로 광활한 수변 풍경을 펼쳐낸다. 김두량 작 (조선 1744년, 국립중앙박물관)는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필치로 쓸쓸한 달밤의 풍경을 잘 표현했다. 이상한 ..

전시 하이킹 202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