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하이킹

번영로 옆 번영주택

form-hiking 2026. 6. 30. 21:09

4월 초 군산에 갔다. 처음 가보는 도시라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었지만, 여행차 간 것이 아니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숙소도 근대기 유산이 밀집한 구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라 군산 구경이라 할 것은 전혀 못 하고 아쉽게 서울로 돌아올 판이었다.

돌아오는 날 오전에 짬이 나서 숙소 근처라도 거닐까 하는데, 숙소에 온 첫날 밤 눈에 띈 연립 주택이 생각났다. 2층 건물 두 동으로 이루어진 연립 주택이 숙소 옆을 흐르는 개천 건너에 있었다. 두 건물은 서 있기보다는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나직한 직육면체 상자 두 개가 땅에 붙은 것처럼 보였다.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오래된 연립 주택을 본다. 그럴 때마다 호기심에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제한된 체류 시간의 한때를 할애하기는 부담스러워 지나치곤 했다. 마침 멀리 다녀오기엔 시간이 충분치 않은 데다 낡은 건물 두 동이 외딴섬처럼 놓인 모양새가 퍽 인상적이었다. 숙소를 나서 개천 건너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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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립 주택이 그렇듯 정말 단순한 모양새다. 아니, 유독 단순하다. 장식이랄 것 없이 건물의 모든 요소를 네모나게, 직각으로 짰다. 건설 업자가 쓱쓱 그림을 그려나가듯 무심하게 설계하고 지체 없이 시공했을 것 같다. 그림에 소질이 없는 내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삼각형으로 지붕을 표현하고, 사각형으로 집의 몸체를 그린다. 마지막으로 십자형 창틀이 달린 네모난 창문 하나를 몸체 중간에 그려 넣는다. 그런 집을 실제로 본 기억은 거의 없는데,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이 그렇게 집을 그린다. 사실 많은 이가 이렇게 집을 그릴 것이다. 집을 표현한 이모티콘도 대개 이와 비슷하게 생겼다. 내력은 잘 모르지만, 삼각형과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가 현대인에게 집의 전형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주택을 처음 봤을 때 호기심이 생긴 이유도 건물의 실제 모습이 머릿속의 단순한 전형과 일치해 기시감을 느껴서일까. 그러니까 이 연립 주택은, 누군가 내게 연립 주택을 그리라고 하면, 딱 그렇게 그릴 것처럼 생겼다.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몸체를 그리고 중간중간에 네모난 출입구를 낸다. 똑같이 네모난 창도 열을 맞춰 그려 넣는다. 너무 심심하다 싶으면 출입구 위쪽 정도는 아치 모양으로 멋을 낸다. 몸체 옆에는 간단하게 동 표기를 한다. 1동과 2동, 혹은 가동과 나동. 몸체 위쪽에는 그림 제목처럼 연립 주택 이름도 써넣는다. 행복, 희망, 사랑 따위의 누구나 뜻을 알고 긍정적인 의미를 띤 단어면 좋겠다. 이 그림을 완성한 사람은 주택 옆을 지나는 도로에서 힌트를 얻었다. 번영로 옆이니까 번영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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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는 단순한 형태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혼란스러운 구석이 많다. 주민이 그려 온 삶의 여정은 네모난 상자의 질서를 어질러 온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극도로 단순한 형태의 건물에 이것저것 덧붙었다. 출입구마다 철제 차양이 생겼고, 주민들이 다용도실이나 창도 같은 용도로 쓰기 위해 증축한 공간이 군데군데 생겨났다. 창틀과 창 난간은 가구마다 제각각이다. 연립 주택 단지의 경계를 이루는 외부 담장도 구간에 따라 다른 모양을 띠게 됐다. 건물 주변에 널브러진 세간과 자재, 누가 돌보는 것인지 방치된 것인지 모호한 화단이 미처 정돈하지 못한 일상의 흔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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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 주택 두 동은 도로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땅에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다. 군산 시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간선 도로가 단지 북쪽을 지난다. 남쪽으로는 2022년에 폐선된 군산화물선(구 군산선)이 지났던 모양이다. 2008년 화물 전용선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군산과 전북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통근 열차가 다녔다고 한다. 위아래로 군산과 인접 지역을 잇는 큰길을 두고 그 사이에 연립 주택이 자리 잡은 것이다. 위에서 두 건물을 보면 북서-남동 방향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데, 입지상 자연스레 간선 도로와 철로가 놓인 방향을 따른 결과로 보인다. 

1983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사십 년을 훌쩍 넘겼다. 주민의 늦잠을 깨우곤 했을 열차 소리는 사라졌고, 정확히 동서남북 방위를 맞춰 반듯하게 정돈된 옆 택지에는 고층 아파트가 솟았다. 저 아파트 건물 또한 서서히 광채를 잃어갈 때쯤, 이 터에는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단순하기 그지없던 이전의 그림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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