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처음 본 순간 나는 매료됐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로 유물을 찾아갔는데, 마을에 들어선 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더는 차가 갈 길이 없어 주택 옆 공터에 주차했다. 밭일하던 주민에게 쭈볐대며 인사를 건넸다. 함부로 차를 세웠다고 핀잔을 듣는 것 아닌가 했는데, 다정하게 인사를 받아줘 고마웠다. 얼굴이 사라진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이 바로 옆에 있었다.
해가 내리쬐는 9월의 한낮이었다. 농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잠깐 걸었다. 곧 넓은 평야가 눈에 들어왔고, 푸르게 펼쳐진 논 뒤로 저 멀리 돌기둥 두 개가 우뚝 서 있었다. 중간중간 멈춰 사진을 찍고, 장쾌한 풍경에 감탄을 반복하며 다가갔다. 당시의 감흥이 깊이 각인되어, 그 이후 내게 강릉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선 푸른 평야였다.









10년 만에 다시 학산리를 찾았다. 계절이 다르니 풍경도 달라졌고 새로 설치된 안내판과 난간도 낯설다. 진입로도 예전보다는 넓어지고 정비된 듯하다. 유물은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의 평야 한가운데에 있다. 남쪽으로는 칠성산이 배경처럼 솟았고, 북쪽으로는 드넓은 논과 밭이 펼쳐졌다. 장애물 없이 사방으로 트인 곳이다. 유물은 거대한 자신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기에는 더없이 최적의 무대에 서 있다. 높이 5.4m로 한국에서 가장 덩치 큰 당간지주로 일컬어진다.
많은 당간지주가 화려한 장식은 없어도 전체적인 형태는 단정하게 다듬어져 인공적인 건축 구조물의 인상을 풍긴다. 얼핏 보기에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대강의 기둥 형태만 갖춘 느낌이다.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 원석을 가공한 듯하다. 강릉 시내에 있는 두 당간지주와 비교해도 이쪽이 야성적인 느낌이 훨씬 강하다.
연마되지 않은 표면에는 천 년 전 작업자의 흔적이 남았다. 원석에서 떼어 내고 모양을 다듬기 위해 수없이 가했던 정과 망치질 자국일 것이다. 표면의 불규칙한 요철은 거칠게 조형된 전체 형상과 맞물려 유물의 야성을 더 도드라지게 한다. 누군가 의식적으로 세웠다기보다는 거대한 돌 두 개가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푹 박힌 것만 같다.
사방에서 보는 형태가 각기 다른 점이 재밌다. 측면에서 볼 때는 넓적한 방망이 모양이다. 당간을 고정하던 막대를 끼우는 구멍이 위아래로 하나씩 뚫려 있어 눈 달린 물고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칠성산을 등지고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은 의의로 호리호리하다. 측면에서 봤을 때의 두께감이 감쪽같이 사라져 같은 유물이 맞나 싶을 정도다.
대각선 방향에서 봤을 때 가장 아름답다. 기둥 상부가 이루는 날렵한 곡선과 열을 맞춰 배치된 4개의 구멍, 절도 있게 각진 모서리, 적당한 양감이 어우러져 안정감과 균형감을 느낄 수 있다. 성글게 조형된 것으로 보였던 유물이 난도 높은 세공의 결과물로 다시 보인다. 아래쪽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면 기계로 작업한 것처럼 정확하게 모양을 냈다.








보통 유물과 관련된 설화나 역사적 배경에 크게 흥미를 갖지 않는데,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다르다. 이 유물은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절인 굴산사의 당간지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에서 서쪽으로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굴산사지(굴산사 터)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굴산사는 이곳 출신 선종 승려인 범일(梵日)이 847년에 세웠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번성한 주요 선종 문파를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일컫는데, 그중 하나가 범일이 이끈 사굴산문(闍崛山門)이다. 굴산사는 사굴산문의 본산으로 알려졌다.
선종의 유행과 구산선문의 성립은 경주의 중앙 권력과 대립한 지방 호족의 대두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연관 지어 해석된다. 범일 역시 중앙 권력과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한다. 굴산사를 위시한 사굴산문은 영동 지역 전반에 세를 미치며, 때론 중앙 권력에 대항하고 때론 협력하며 나말여초의 혼란기를 통과한 지역 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굴산사는 고려시대까지 번성하다 조선시대 초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범일의 영향력은 특별한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그는 영동 지역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신격화되어 오늘날까지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神)인 대관령국사성황으로 받들린다. 입적한 승려가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한다. 범일이라는 인물과 그가 대표한 세력이 긴 시간 동안 영동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학산리의 산과 평야를 근거지로 삼아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의 마지막 흔적 같은 것이다. 그들의 땅은 지금의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역사에는 그 삶이 기록되지 못했다.
범일을 비롯한 많은 선종 승려가 당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인근 지역에서 발견된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한국의 다른 지역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당 미술의 특징을 보인다.* 이들이 독자적으로 이국 문화를 수용해 독특한 지역 문화를 형성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들을 미지의 존재로 신비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관령 너머 영동 지역에서 펼쳐진 옛 서사시의 한 조각이라는 점이, 평야에 홀로 서 있는 거대한 유물을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굴산사지 주변에는 범일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과 범일의 탄생 설화와 관련된 석천(石泉)이라는 우물이 있다. 승탑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았다. 당간지주 동쪽에는 앞서 언급한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이 있고, 다른 불상 몇 구도 학산리에서 발굴되었는데, 그중 머리 없는 불상 한 구가 석천 위에 놓여 있다.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진 유물이 있다.
굴산사지에는 무성하게 잡초가 자랐다. 관리 작업을 했는지 풀의 높이가 비교적 일정해 푸른 초원처럼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폐사지가 우아하게 일렁인다.
마을이 강릉 일대를 잇는 트레킹 코스에 포함되면서 여행자 센터가 들어섰고 부녀회가 운영하는 식당이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예전보다 마을을 오가는 사람이 늘었을 듯하지만, 유물들 주변에는 통 인적이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산리 마을은 아름답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마을의 불상들처럼 고요하다.






2025년 5월
* 최성은, <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헤리티지:역사와 과학》통권 56호, 2021, pp.5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