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하이킹

마카오의 풍경

form-hiking 2025. 2. 10. 21:41

 
입면이 평평한 한국 아파트와는 달리 마카오의 아파트에는 수많은 창문과 발코니가 전자 기기의 버튼처럼 돌출되어 있다. 이들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반원과 타원형을 기본 모티브로 삼아 변주된 형태가 다양하다. 적어도 20년은 넘긴 듯한 건물이 대부분이다.
 
건물마다 빈틈없이 들어찬 창문에서 최대한 세대 수를 늘리고자 한 의지가 보인다. 마카오의 인구 밀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밖에서 봐도 좁은 집에서 사람과 세간이 복작대는 일상이 그려진다. 건물 입면이 햇빛을 받으면 입체적인 구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그림자와 반사광이 피어난다. 혼란스럽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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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탓에 마카오 반도에 위치한 유적은 거의 둘러보지 못했다. 오전에 세나도 광장 인근과 세인트폴 성당 정도만 구경했는데, 여행 기간이 중국 국경절 연휴와 겹쳐 인파가 몰리기 전에 급하게 빠져나와야 했다. 그나마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낸 곳이 세나도 광장 길 건너편에 있는 관공서 건물(Municipal Affairs Bureau)이다. 어딘지도 모르고 사람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더니 예쁜 원형 정원이 나왔다.
 
포르투갈식 도자기 타일인 아줄레주와 짙은 녹색 잎 식물로 둘레를 장식하고, 정원 중앙부에는 분홍색 천일홍을 배치했다. 전체적인 인상이 산뜻하고 곱다. 소박한 돌 구조물이 정원의 단정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정원 양 측면에 각각 포르투갈 시인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1580)와 주앙 드 데우스(João de Deus, 1830~1896)의 두상을 놓고, 각기 다른 잎 크기와 형태를 고려해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3종의 식물을 삼단으로 배치했다. 세심하게 가꾼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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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파 빌리지를 걷다가 마주친 작은 화단도 기억에 남는다. 돌난간이 설치된 계단 양옆으로 작은 화분들을 두고 난간 너머로 화단을 알차게 꾸몄다. 볕이 든 모습이 싱그러웠다. 꽃과 잎의 형태와 색상, 길이 등이 제각각 다른 식물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질서 있게 구역을 나눠 자리 잡았다. 앞서 들른 관공서 건물의 정원처럼 가꾼 이의 손끝이 야무지다. 사람의 손길을 적당하게 탄 화단에 야자수와 노거수까지 어우러졌다. 
 
관청이 꾸몄을까, 주민이 꾸몄을까. 매뉴얼이 있는 걸까. 포르투갈 문화의 잔영으로 조경 문화가 발달한 걸까. 유난하게 꾸미지 않아도 결손 없이 표현하는 감각의 연원은 어디로 닿을까. 며칠을 머문 여행자가 멋대로 상상한다. 상이한 문화가 뒤섞이다 보니 중국의 것이기도 하고, 포르투갈의 것이기도 한, 동시에 그 어디의 것도 아닌 무엇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견문에서 견문으로 이어지며 마카오 반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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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인이 마카오 반도에 정착해 체류한 기간은 400년이 넘는다. 1999년 12월,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된 후 20년 이상 흘렀지만, 아직도 도로명이나 지명을 표기할 때 중국어와 포르투갈어를 병기하고, 관공서 건물 정원에는 포르투갈 국민 시인의 두상이 놓여 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흔적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일종의 식민 통치가 존재했지만,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 양상이 한국의 일제강점기와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관련 문헌을 보니 마카오에 대한 포르투갈인들의 태도는 실리적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국인에게 자신들의 언어와 습속을 강요하지 않았고, 거주권과 통치권을 얻었지만 마카오가 중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인정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무역의 전진 기지를 확보한다는 목적 이외의 것에는 무리해서 힘을 들이지 않은 듯하다. 크고 작은 충돌은 있었겠지만, 포르투갈인과 중국인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여러 문화가 뒤섞이는 개항장에서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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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화사하게 칠하는 파스텔 톤 건물, 사람으로 붐비는 에그타르트 가게, 콜로안 빌리지의 해안가에서 만난 멋들어진 서양식 빌라, 중국 전통 회화에 등장할 법한 장면을 아줄레주로 표현한 호텔 장식품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매끈하게 표백된 이문화의 흔적을 본다.
 
공상은 이어졌다. 정원이나 화단을 보며 제멋대로 상상했듯,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벌어진 일들이 이래저래 빚어낸 형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거라고. 16세기 초 포르투갈 사람들이 찾아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는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던 곳. 기기묘묘한 자연환경도 없고 대륙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동네에 시끌벅적한 사건이나 사람들이 모여들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곳에 대양을 건너온 서양인들이 찾아와 바다 건너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활짝 열었다. 밀물을 따라 들어왔다 긴 시간이 흘러 남방의 햇빛과 바람에 풍화되고 남은 것들, 순하면서도 세련된 것들.   
 
스스로도 공상인 것을 잘 알면서 계속했다. 마카오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형 호텔이 밀집한 코타이 스트립의 스펙터클한 풍경과 대비되는 것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보기에 좋아서 굳이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콜로안 빌리지를 걷다가 어느 담벼락을 보고 멈춰 섰다. 노란 담벼락에 큼지막하게 하얀 바탕의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 형상을 새겼다. 벽화라기보다는 부조에 가깝다. 검은 선으로 형상의 테두리를 만들고, 선 안쪽 공간에 색을 칠해 푸른 옷을 입은 아이와 나무를 표현했다. 아이는 모종삽을 들었고 나무는 조그맣다. 아이가 막 묘목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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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등장한 고졸한 형상에 홀려 한편에 붙은 표지판을 살펴본다. 콜로안아동공원. 활짝 열린 철문을 지나쳐 들어가니 한국에서도 주택가를 걷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공원이 나온다. 놀이터가 있고, 그늘을 만드는 큰 나무와 앉을 곳이 있다. 한낮의 태양 때문인지 사람은 없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이면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마카오의 아이들은 이런 것을 보고 자라겠구나, 또 한 번 실없이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이다.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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