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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신기루는 사라지고

마음먹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중 보행로를 따라 걸으면서 세운상가(정확히는 청계상가, 대림상가, 진양상가 등을 포괄하는 세운상가군)를 둘러보기로 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건물 측면에 설치된 공중 보행로를 걷다 건물 안으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 저층부의 상점가로 들어선다. 오밀조밀 모인 상점들을 지나 건물의 남쪽 끝까지 가 계단을 오른다. 예전에는 주거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주로 사무실로 쓰이는 상층부의 아파트 구역으로 진입해 다시 건물의 북쪽 끝까지 걸으며 중정 공간을 지난다.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다가 계단을 내려와 공중 보행로로 돌아온다. 계속 걸으며 같은 여정을 반복한다.   멀리서 보면 세운상가는 각진 기차와 같은 모양이다. 다양한 크기의 직육면체 블록을 쌓아 만든 것 같은..

유물 하이킹 2024.10.18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아니카 이(Anicka Yi)- 리움미술관, 2024.9.5~12.29 ○ 한국계 미국인 작가. 여성. 1971년생. 영화를 공부하고 패션 업계에서 일하다 3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고 함.  ○ 작가의 이력에서도 엿보이지만, 제한된 소재와 영역을 반복해 탐색하면서 조금씩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다양한 영역에 호기심을 갖고 이를 거리낌 없이 끌어안으면서 작품 세계를 넓혀 나가는 유형의 작가로 보임.  ○ 2022년에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은 외국계 갤러리(글래드스톤)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열었고, 이번 전시가 아시아에서 여는 첫 미술관 개인전이라 함.  ○ 조형적인 측면에서 간략하게 작업 세계를 정의하면,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계. 조형적으..

전시 하이킹 2024.09.23

메종 투 메종 2024: 모르는 한국

- 메종 투 메종 2024: 모르는 한국- 정동1928아트센터, 2024.8.30~9.6- 글 발행일 이전 종료 전시 ○ 《메종 마리끌레르》 잡지사가 주최한 전시. SNS에서 소식을 접했는데, 어떤 전시인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는 가전, 가구, 생활 잡화 브랜드의 제품과 미술품을 한 공간에 배치해서 쇼룸처럼 보여주는 콘셉트.  ○ 미술품으로는 고가구, 나전공예품, 목공예품, 도자기 등의 고미술품과 이우환, 이수경, 이배 작가 등의 평면과 조각 작품이 있었다.  ○ 고미술품 중에서 처음 보는 종류의 것들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조선철(朝鮮綴)과 지직화(紙織畫)라는 것인데, 조선철은 깔개, 담요, 휘장 등으로 쓰인 직물 공예품이고, 지직화는 공예 기법으로 만들어진 회화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공예 쪽이야 워..

전시 하이킹 2024.09.10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정영선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7전시실 외,  2024.4.5~9.22  ●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 1941년생. 아마도 조경가로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인물일 듯. 국현에서 조경을 다룬 전시도 처음인 듯하고. 다른 곳에서도 조경가의 전시를 본 기억은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0년대 들어 건축을 다루기 시작한 데 이어 산업 디자인과 같이 기존의 미술사에서 잘 다루지 않거나, 부각하지 않았던 장르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시 역시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는 듯. 반가운 일이다.● 작가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학계에 있다가 87년에 서안이라는 조경설계 업체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조경 작업에 뛰어듦. 현재까..

전시 하이킹 2024.09.09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2024.5.1~8.4글 발행일 이전 종료 전시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갔는데, 덕수궁 전시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 처음 봄. 예약 없이 방문해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하는 사람들 때문에 입장 대기 줄이 생겼을 정도. 전시실 4곳 모두 줄 서서 작품들을 봐야 할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돌아다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온이 무척 높은 날이었는데도 그랬다. 최근 국현 전시의 일반적인 상황인 것인지, 근대 자수라는 주제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그런 것인지, 전시 마지막 날인 데다가 일요일인 점까지 겹쳐서 사람들이 몰린 건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파에 놀랐음.  전시 해설문에서 ‘자수 실천’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사용..

전시 하이킹 2024.09.04

이신자, 실로 그리다

'이신자, 실로 그리다', 이신자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원형전시실, 2023.9.22~2024.2.18 글 발행일 이전 종료 전시1930년생 섬유미술가. 태피스트리를 한국에 거의 처음 소개한 작가인 듯. 알고 보니 부군이 장운상 화백.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인터뷰 영상을 언제 촬영한 건지 모르겠는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정정하셔서 놀랐다. 초기작도 단순한 자수 작품이 아니라 ‘실로 그렸다’라는 표현이 수사가 아님을 알려주는 작품들. “천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크레파스나 안료를 칠하거나 아플리케하여 자수와 염색을 하나의 화면에 담았다”. 섬유미술 작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정확히 위치 지울 순 없지만, 자수라기보다는 ‘직물을 이용한 평면 작업’이라고 묘사하는 게 정확할 듯. 처음에는 자수하는 분들로..

전시 하이킹 2024.09.04

착륙, 셰일라 힉스

Atterrissage(착륙), Sheila Hicks(셰일라 힉스)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 2024.4.30~9.8전시품이 단 3점이다. 전시 공간 자체가 그리 넓지 않은데다 작품들 크기가 크다 보니 공간을 꽉 채운다. 모두 설치작이고, 루이 비통 재단 소장품. 전시 타이틀과 동명인 , , , 이렇게 3점.작가의 작품은 인터넷에서 이미지로만 봤는데 한 번쯤 실견하고 싶었다. 작가는 직물이 길게 늘어져 있거나 작은 산을 이루며 쌓여있는 대형 설치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사진으로만 봐도 거대한 크기와 채도 높은 색상이 결합해 작품이 에너지를 내뿜는 느낌을 받음. 어떤 작품은 그로데스크한 분위기도 풍겼다.   전시작들을 보면 작가는 굵은 실을 꼬아서 긴 밧줄 형태를 만들거나, 면, 리넨, 아크릴 섬유 등의..

전시 하이킹 2024.09.04

종묘에서

이야, 덥다. 더위가 절정으로 향하는 계절인데 해가 뜬 시간을 피하지 못했다. 종로 거리에서 바라보면 종묘로 향하는 길은 물줄기처럼 부드럽게 휘어 있다. 사정없이 파고드는 햇살을 피해 저벅저벅 곡선을 걸어 다가간다.  번잡한 종로의 공기를 뒤로 하고 외대문(外大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왕과 세자, 신(神)이 가는 길이 따로 있다. 고민하다 아무런 함의가 없는 흙바닥을 밟는다. 나무, 새 소리, 가벼운 바람, 길을 따라 트인 시야,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 분주히 행선지를 찾는 관광객의 시선. 아직 일상의 열기를 떨구지 못했는데 다른 세계로 훅 떠밀려 들어온 기분이다. 2024년 8월 현재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온전히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정전(正殿)의 정면을 마주하는 일은 한국 유물의 조..

유물 하이킹 202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