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정영선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7전시실 외, 2024.4.5~9.22
●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 1941년생. 아마도 조경가로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인물일 듯. 국현에서 조경을 다룬 전시도 처음인 듯하고. 다른 곳에서도 조경가의 전시를 본 기억은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0년대 들어 건축을 다루기 시작한 데 이어 산업 디자인과 같이 기존의 미술사에서 잘 다루지 않거나, 부각하지 않았던 장르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시 역시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 위에 있는 듯. 반가운 일이다.
● 작가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학계에 있다가 87년에 서안이라는 조경설계 업체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조경 작업에 뛰어듦. 현재까지 대표이사로 서안을 운영하고 있다. 전시 설명 글에도 살짝 언급되듯이(“본 전시가 조명하는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철학, 작품세계 속에는 조경건축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를 배출해 온 서안이라는 공동체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다.”) 정영선 개인의 작업과 서안이라는 회사의 작업은 분리하기 어려울 듯한데, 실제 전시에서 특별히 서안에 대해 소개하거나 다루지는 않음. 현재도 영업 중인 영리 업체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전시 규모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어서 여력이 없었을 수도. 오롯이 개인의 작업이 될 수 없는 건축이나 조경을 다루는 전시에서는 건축가나 조경가 개인과 이들이 속한 업체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도 기획자의 고민거리가 되지 않을까.
● 작가의 작업물에 방문했던 공간이 여럿 포함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광화문광장, 경춘선숲길공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올림픽선수촌아파트 등. 사실 해당 공간들에 드나들며 조경 작업에 대해 인식한 적은 거의 없다. 일례로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올해 들어 러닝을 하러 자주 간 곳인데, 생각보다 예쁘게 꾸며져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게 조경 작업의 결과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일상에서 조경이라는 행위와 그 결과물을 인지하거나 관심을 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감함.
● 위 공간들의 조경이 모두 한 사람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돌이켜 보면 몇몇 공간의 풍경에 일관된 결이 있었던 것 같다. 힘을 주어 꾸미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점, 일부러 꾸민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점, 조경의 재료들로 공간을 꽉 채우지 않고 빈 곳을 둔다는 점 등.
● 사진과 영상으로 작가의 집과 정원도 볼 수 있었는데, 아마 작가의 지향을 가장 투명하게 알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위에 언급한 속성들이 다 드러나는데, 좀 더 브레이크 없이 밀어붙인 느낌이랄까.
● 스케치, 단면도, 입면도, 설계도, 배치도 등 조경 작업 과정에서 생산된 다양한 자료들도 재미있게 봤다. 수채화 스케치도 있었는데, 조경가에게는 클라이언트가 추후 완성될 조경 결과물을 유추하게끔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참 큰일이겠구나 생각함. 조경가가 자신의 아이디어와 실제 풍경 사이의 격차를 줄여가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일 것 같고.
● 전시는 집중해서 보기 힘들었다. 물리적인 공간에 비해 담고자 하는 내용이 너무 많았고, 텍스트도 많았다. 게다가 전시물인 도면이나 사진, 영상 등으로는 아무래도 실제 조경 결과물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전시 설명 글을 따라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지는 못했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들에 구체성이 없어서 더 그랬다.
● 이번 전시에서는 ‘지사(地史)적 맥락’, ‘터의 무늬’와 같은 용어가 쓰였는데, 건축과 관련된 전시나 담론에서는 주변 환경이나 자연과의 조화, 공간의 역사·문화적 맥락에 대한 고려를 강조하는 언술이 예외 없이 등장한다. 아마 내가 접한 건축 관련 콘텐츠가 대중을 상대로 한 것들이다 보니 착시 효과가 생긴 것일 수도 있고, 견문이 부족해서 오해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한국 건축 관계자들의 철학이나 담론이 다양하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다른 이야기도 궁금하다.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1&exhId=202401150001735
https://view.mmca.go.kr/streamdocs/view/sd;streamdocsId=TKEVa41hwt1upoEw-M7N4pZJvlErOEEgZGyNaqfFGXA
'전시 하이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5) | 2024.09.23 |
---|---|
메종 투 메종 2024: 모르는 한국 (3) | 2024.09.10 |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3) | 2024.09.04 |
이신자, 실로 그리다 (1) | 2024.09.04 |
착륙, 셰일라 힉스 (1) | 2024.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