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2024.5.1~8.4
- 글 발행일 이전 종료 전시
- 오후 4시가 조금 넘어서 갔는데, 덕수궁 전시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 처음 봄. 예약 없이 방문해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하는 사람들 때문에 입장 대기 줄이 생겼을 정도. 전시실 4곳 모두 줄 서서 작품들을 봐야 할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돌아다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온이 무척 높은 날이었는데도 그랬다. 최근 국현 전시의 일반적인 상황인 것인지, 근대 자수라는 주제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서 그런 것인지, 전시 마지막 날인 데다가 일요일인 점까지 겹쳐서 사람들이 몰린 건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파에 놀랐음.
- 전시 해설문에서 ‘자수 실천’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사용됨. 특별한 뜻을 담은 개념 용어로 보이진 않았다.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되는 공식 해설문인만큼, 미술관에서 이런 용어는 스크린하는 장치가 마련되면 좋겠다.
- 전시 섹션 구성은 1) 백 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2) 그림 갓흔 자수, 3) 우주를 수건 삼아, 4) 전통미의 현대화. 1)에서는 19세기 무렵에 제작된 전통 자수 작품 및 전통의 자 안에 놓인 근대기 자수 작품, 2)에서는 근대기 일본 유학 및 조선미술전람회 개최에 따라 전통 자수와는 차별화되는 근대기 자수 작품, 3)에서는 광복 후 제작된 현대 자수 작품 4)에서는 3)에서 소개된 현대 자수와는 조금 다른 결에서 전통 소재나 모티브를 활용해 제작되었거나 전통을 복원한 현대 자수 작품 소개.
- 근대기에 평안도 안주 지역에서 전문적인 남성 자수 장인들이 집단 제작한 자수가 많이 유통되었다고 하는데 흥미로운 현상. 자수는 철저히 규방 문화의 요소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남성 장인 집단이 존재했다는 것도 이채롭고, 근대기에 새롭게(이 부분은 확인 필요) 등장한 배경도 궁금함.
- 일본 여자미술학교 졸업생의 작품과 교육 내용이 2전시실의 주요 내용으로 소개됨. 당시 여학생들이 가장 많이 간 학교였고, 특히, 자수과가 있어서 근대기 한국 자수 생태계 형성에 핵심 역할을 한 교육 기관이기 때문. 1945년에 이화여대에서 국내 대학 중 최초로 자수 전공을 개설했는데, 당시 교원들이 모두 여자미술학교 출신이라고. 학생들의 과제, 졸업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확실히 일본풍이 느껴져서 전통 자수와는 결이 아주 다르다.
- 김규진 외 <자수 매화도 병풍>, 국립현대미술관: 김규진의 그림과 글씨를 모본으로 제작된 작품인데, 1폭과 10폭에 배치된 유려한 글씨가 거대한 매화도 자수와 어울려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자수 준이종정도 병풍>,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중국 청동기 제기들을 한 폭당 4개씩 배치한 작품인데, 감색 바탕에 금실로 짜 넣은 화면이 무척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자수 병풍 8폭>: 1전시실 동선상 거의 마지막에 배치된 작품인데 이날 본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었다. 캡션에는 19세기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2020년 부산박물관이 신수 유물 소개 전시를 하면서 보도된 기사를 보니 20세기 전반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음. 전통 자수 작품과 비교하면 대상의 외곽선에 진하게 처리되었고, 상당히 회화의 성격이 짙다. 현장에서도 뭔가 전통 작품과는 많이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기사를 보니 역시 일본 영향을 언급함. 화면 구성이 공교하고 감각적이어서 계속 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 1전시실에서부터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들이 많았다. 실의 색과 광택, 자수 기법에 따라 굉장히 드라마틱하게 표면 효과가 바뀌고, 특히 2전시실로 가면 회화나 사진보다 더 입체적으로, 더 극적으로 대상을 재현한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하니 말 그대로 보기에 즐거운 작품들이 많았음.
- 다만, 이런 시각적 효용이 2전시실을 지나면서 굉장히 급격하게 체감함. 효용의 포인트가 작품마다 아주 큰 변화 없이 반복되는 경향도 있고, 결국 초반에 느꼈던 시각적 효용의 기저에는 ‘와, 자수로 이런 것도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경탄 역시 깔린 것인데, 이미 자수의 표현 범위가 기존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보다는 꽤 넓다는 것을 앞선 작품들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그러한 경탄 역시 오래 유지되기는 힘들다.
- 자수 작품은 픽셀 아트 같은 디지털 그래픽 이미지의 느낌이 강하다. 조선시대와 근대기에 제작된 작품들에서 디지털 이미지와의 친연성을 발견하는 것도 무척 이채로운 경험.
- 2전시실에서 작품 크기를 막론하고 상당히 세련되고, 공을 많이 들인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놀라운 점은 이들 작품이 1930년대에 교사의 지도 아래 여고생들이 공동 제작한 작품들이라는 것. 여학생들이 공모전 출품을 위해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당시에는 관행이었던 듯. 그런데, 완성도가 무척 높다. 대가의 작품이라고 캡션에서 소개했으면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을 정도.
- 아무리 훈련을 많이 했고, 작업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해도, 대학 전공자도 아닌 일반 여고생들이 어떻게 기술적으로 저런 수준의 작품을 만들 수 있나, 자수를 숙련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함. 학생들의 실제 트레이닝과 작품 제작 과정이 궁금해짐.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3&exhId=202302150001629
'전시 하이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5) | 2024.09.23 |
---|---|
메종 투 메종 2024: 모르는 한국 (3) | 2024.09.10 |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0) | 2024.09.09 |
이신자, 실로 그리다 (1) | 2024.09.04 |
착륙, 셰일라 힉스 (1) | 2024.09.04 |